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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봄

봄의 시작을 규정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기상청에선 일평균 기온을 보고 정한다. 천문학에선 춘분점을 따지고, 절기로는 입춘이 지나면 봄이 왔다고 한다. 개구리가 깨어나는 걸 알진 못해도, 사람마다 다양한 신호로 봄이 왔음을 인식한다. 누군가는 피는 꽃을 보고 깨닫고, 또 누군가는 바람에 묻은 온기로 안다. 에디터들도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봄을 맞이한다. 모터사이클을 타거나, 야구장에 가거나, 땀을 흘리거나. 봄을 맞이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풀어놓기로 했다. 그 소소하지만 소중한 시간을 통해 찬란한 봄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UpdatedOn May 05, 2025


1 봉인이 풀리다

모터사이클 타는 사람에게 봄은 라이딩 시즌이 열리는 계절이다.


Editor 김종훈

햇살이 부드럽게 몸을 감싼다. 공기에 따스한 온기가 스민다. 풍경에 색이 돋아난다. 그럴 때면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움츠러드는 겨울보다 봄이 반가운 건 다들 매한가지다. 스키나 빙벽 등반 같은 겨울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선 아쉬울 일 없다. 추위는 고통, 따스함은 행복과 연결되잖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렇다고 예전부터 특별히 봄을 좋아한 건 아니다. 그냥 해가 바뀌고 계절이 달라지는 흐름을 인식하는 정도였다. 졸업, 입학, 새 학기 같은 두근거리는 단어와 어울리는 나이는 아니니까. 그렇게 지내왔다.

봄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한 건 모터사이클 덕분이다. 그냥 설레는 수준이 아니다. 말년 병장이 전역일 기다리듯 날짜 세어가며 기다릴 정도로 간절하다. 모터사이클 타면서 봄의 의미 자체가 달라진 까닭이다. 흔히 봄은 만물이 태동하는 계절이라고 하잖나. 모터사이클 타는 사람에겐 만물보다 오직 라이딩 시즌이 시작된다는 데 더 의의를 둔다. 겨우내 타지 못한 금단 증세를 해소할 봉인이 풀리는 계절. 그렇다. 봉인 해제. 금주령이 해제된 1930년대 말 미국인의 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 아직 찬 바람 휘몰아치는 2월 말, 3월 초부터 마음이 들썩인다. 매일 날씨를 확인하고, 기온 1~2℃에 일희일비한다. 오늘은 탈 수 있을까.

올해는 더 그랬다. 봄이 예전보다 추웠으니까. 일희일비가 아닌 매일 울상이었다. 봄이 완연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확인만 했다. 시한부 인생처럼 하루하루가 안타까웠다. 봄에 열리는 시즌 오프닝 행사도 안타까운 상황이 이어졌다. 봄이 오면 모터사이클 브랜드마다 시즌 오프닝 투어를 기획한다. 호기롭게 2월 말부터 감행하는 브랜드도 있다. 3월 초는 보편적이고, 3월 말이면 조금 늦었다는 말을 듣는다. 올해는 다들 날씨 덕을 못 봤다. 추위에 떨며 오갔다는 후기가 줄을 이었다. 그럴수록 완연한 봄이 더욱 고팠다.

4월로 달이 바뀌자 봄이 무르익었다. 아침저녁으로 온도가 달라졌다. 오후에는 제법 덥기까지 했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 본격적으로 모터사이클 라이딩을 즐길 때다. 그냥 봄이 아닌, 완연한 봄이어야 제대로 달릴 맛이 난다. 모터사이클 라이딩은 몸을 드러내고 달려야 한다. 조금 따뜻해졌다고 달리면 어김없이 춥다. 완연한 봄이 딱 달리기 좋은 온도다. 따스하면서도 시원하고, 가뿐하면서도 화창한. 풍경 또한 그때쯤 알록달록해진다.
그냥 봄에 모터사이클 타는 것도 좋지만, 하나 더 재미를 더했다. 봄에 새로운 모터사이클 타기. 겨우내 출시한 신모델을 본격적으로 시승하는 시기 역시 봄이다. 그냥 타도 즐거운데 안 타본 신모델까지 타니 더 즐겁다. 모터사이클을 탄 이후로, 모터사이클 관련 글을 쓴 이후로 봄은 그렇게 두 가지 즐거움을 만끽하게 했다. 이번에도 그날이 왔다.

 


“겨우내 타지 못한 금단 증세를 해소할 봉인이 풀리는 계절.
금주령이 해제된 1930년대 말 미국인의 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

3 / 10

 

세포가 깨어나는 순간

뭘 탈까. 행복한 고민이 시작됐다. 겨우내 출시한 신형 모터사이클을 떠올렸다. BMW 모토라드의 대표 모델 R 1300 GS 어드벤처를 탈까. 도로든 흙길이든 멀리 편안하게 달리기엔 그만한 모델이 없다. 하지만 너무 크다. 이번에는 근교를 달릴 거라 부담스럽다. E-클러치라는 신기술을 적용한 혼다 CBR650R을 탈까. 클러치를 조작하지 않아도 돼 편하지만, 엎드려 타고 싶지 않다.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다. 원래 엎드려 타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봄부터 몸이 삐걱거리는 걸 느끼고 싶지 않다. 최종 결정은 혼다 GB350C. 혼다에서 선보인 클래식 스타일 모터사이클이다. 배기량은 348cc, 출력은 21마력이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 성능보다 감성. 비슷한 배기량의 현대식 모터사이클에 비해 출력이 낮다. 대신 고전적 외관에서 주는 감흥이 크다. 엔진의 질감이나 성능 또한 고전적 운치를 강조한다.
봄을 느끼면서 유유자적 달리기엔 GB350C가 알맞다. 타는 재미만 따지면 고성능 모터사이클이 절대 우위다. 하지만 고성능 모터사이클은 성능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그것 나름대로 즐겁지만, 지금 만끽할 즐거움은 아니다. 짜릿한 쾌감은 아스팔트가 뜨거워질 때를 기약한다. 지금은 몸의 힘 풀고 풍경에 스며들며 달리고 싶다. 뜨거운 시즌에 앞서 예열하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그러면서 모터사이클 라이딩의 고전적 유희에 집중하면서. 그럴수록 몸에 봄이 새겨지니까.

시동을 걸자 도도도동, 하며 머플러에서 구수한 소리가 났다. 2025년식 신형 모터사이클이 낼 법한 소리는 아니다. 반세기 전 모터사이클에서나 듣던 고전적 배기음. 그래서 더 자료 사진 속 모터사이클 같은 외관을 운치 있게 포장한다. 1단 넣고 클러치를 붙이고 출발. 헬멧 속으로 싱그러운 바람이 들어온다. 코끝이 빨개지는 차가운 바람이 아니다. 따스하면서도 어디선가 풀 냄새가 나는 듯한 바람. 태동하는 만물처럼 그 바람이 몸의 세포를 하나씩 깨웠다. 봄의 라이딩은 세포가 살아나는 경이로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

꼭 비유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실제로 모터사이클을 타려면 몸 전체를 써야 한다. 오른손은 스로틀을, 왼손은 클러치를 조작한다. 또 오른발은 뒤 브레이크를, 왼발은 기어를 부린다. 게다가 모터사이클을 좌우로 움직이려면 몸을 기울여야 한다. 그때 핸들 바만 조작하는 게 아니다. 몸 전체, 특히 하체를 써서 모터사이클을 움직여야 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몇몇 동작이 어색하면 모터사이클 움직임도 삐걱거린다. 정말 온몸으로 타는 셈이다.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하니 온몸의 세포가 깨어날 수밖에 없다. 스로틀 감아 도로를 유영하듯 나아가면 바람이 몸을 스쳐 간다. 모터사이클을 탄다는 말은 곧 바람을 맞는다는 뜻이다. 스치는 바람결에 따라 몸의 세포가 깨어난다. 그럴 때면 헬멧 속에서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다. 신나서.  


“스치는 바람결에 따라 몸의 세포가 깨어난다.
그럴 때면 헬멧 속에서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다. 신나서.”

3 / 10

클래식 스타일 모터사이클 타고 레트로 콘셉트 가게 앞에 서면. 

  • 클래식 스타일 모터사이클 타고 레트로 콘셉트 가게 앞에 서면.
  • 모터사이클 라이딩은 온몸으로 봄을 느끼는 방법.
  • 혼다 GB350C는 아날로그를 지향한다.
  • 모터사이클 위에서 보는 풍경은 그냥 볼 때와는 조금 다르다.

봄의 비행을 즐기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서울에서 가볍게 라이딩을 하려면 동쪽이 정답이다. 용마터널을 지나면 금세 도심을 벗어나 자연과 가까워진다. 팔당을 지날 때면 강도 건넌다. 좌우로 펼쳐진 강을 다리 위로 건널 때면 마치 비행하는 기분도 든다. 자동차로 건널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해방감이다. 지붕 열리는 컨버터블이라 해도 비교 불가. 몸을 자극하는 바람의 농도가 다르다. 모터사이클을 타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람이 휘감는다. 바람을 타고 가는 기분, 즉 날아가는 기분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모터사이클은 기울어진다. 기울어진다는 건 3차원적 움직임이다. 직진과 좌우 이동이라는 평면적 움직임에 기울어짐이라는 또 다른 축이 더해진다. 그럴 때 공중을 비행하는 쾌감이 번진다. 비록 두 바퀴가 도로에 붙어 있다고 해도. 모터사이클 브랜드 엠블럼이나 모델명에 날개, 비행 같은 요소가 들어가는 이유다. 그렇게 모터사이클은 날개 없는 인간의 날고 싶은 욕망을 채워준다.

봄에 모터사이클을 타면 짜릿한 이유가 한동안 못 탔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터사이클 라이딩, 특히 교외로 나서는 라이딩이 계절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하는 까닭이다. 온몸을 스치는 바람이, 헬멧 속으로 들어오는 풀 내음이, 색을 입은 풍경이 봄을 즐기게 한다. 도시에서 벗어날수록 어김없이 봄이 연출하는 변화가 눈에 박혔다. 일상에선 무심코 지나치는 변화가 모터사이클 위에선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이제 다시 시즌이 닫히는 겨울이 되기까지 즐길 수 있다는 두둑해진 마음과 함께. 봄이기에 더 선명하고, 봄이기에 더 반갑다.
GB350C는 그 과정을 보다 찬찬히 즐기게 했다. 느긋하게 달릴수록 더 재밌는 모터사이클이니까. 시속 60~80km로 달리면 딱 즐겁다. 도로 끝 소실점보다 도로 풍경에 눈길이 쏠리는 속도랄까. 단기통의 간질간질하는 진동도, 도도도동, 하는 배기음도 그 속도의 맛을 증폭한다. 애초 봄의 라이딩을 즐기려고 선택한 모델이니까. 옳은 선택이었다. GB350C 위에선 개나리의 노랑도, 풀의 초록도 한층 선명하게 보인다. 방석처럼 편안한 시트, 긴장하지 않게 하는 출력, 유순한 움직임도 분명 일조했다. 클래식 스타일 모터사이클이라서 더욱 운치 있게 달렸다. 과거에도 이렇게 봄을 느낀 사람이 있었겠지,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하면서.

모터사이클 라이딩은 봄을 맞이하는 나만의 자세다. 모터사이클을 타기 시작한 이후로 어김없이 봄이 되면 거행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하루 진하게 모터사이클을 타야 이제 봄이라고 몸이 인식한다. GB350C와 함께한 이번 라이딩 역시 봄을 몸에 새겼다. 오랜만에 타니 역시 즐거웠다. 앞으로도 즐거울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기대하게 하는 마음은 봄을 느끼는 것 외에도 봄에 탈 때 더 짜릿한 이유다. 타는 내내 한 해 동안 모터사이클 타며 즐길 시간도 기대한다. 봄이기에 차오르는 기대다. 어릴 때 봄이 되면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잖나. 이제 어릴 때만큼 기대할 만한 일이 드물다. 그러니 모터사이클 타고 달릴 날을 기대하는 마음은 얼마나 소중한가. 봄에 모터사이클 타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

3 / 10

출발하기 전 장갑을 끼는 설렘이란. 

  • 출발하기 전 장갑을 끼는 설렘이란.
  • 달리면서 흐릿해진 풍경이 봄의 운치를 증폭한다.
  • 도도도동. GB350C의 배기음은 소박한데 매력적이다.

2 야구가 제철이다

경북 출신 LG 트윈스 팬이 야구공 하나만 쫓아다니며 보낸 어느 봄날의 하루.
Editor


주현욱

내 인생의 세리머니는 늘 봄에 있었다. 룸메이트와 파닭을 사이에 두고 자축했던 대학교 입학식도, 빨간 명찰을 달고 처음 부모님을 만나던 군대 수료식도, 온 가족이 10년간 엄마를 설득한 끝에 강아지를 처음 데려온 날도, 종이 잡지를 스크랩해가며 에디터의 꿈을 키우게 해준 <아레나>에 입사하던 날도 모두 봄이었다. 봄이 되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건 그럴 만한 일들이 봄에 많았기 때문이다. 20대 후반을 지나 30대 초반이 되면서 문득 느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그 이유를 생각해봤다. 30대는 기대하고 고대할 만한 일들이 많지 않아서.

인생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20대는 유독 변곡점이 많은 시기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첫 연애를 하고, 군대에 가고, 다시 전역하고, 졸업을 하고, 취업하는 식으로. 반면 30대는 하염없이 흘러만 간다. 시인 심보선은 ‘삼십대’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정말 그렇다. 사는 둥 마는 둥 살다 보면 나이의 뒷자리는 터무니없이 빠르게 변해간다. 지금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오늘도 벌써 4월 중순이라 생각하면 머릿속이 아찔하다. 30대에도 여전히 기다리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대하는 것보다는 피하고 싶은 것들이 더 많은 나이지만, 여전히 기다려지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야구 시즌이다. 프로야구는 봄에 시작해 가을에 끝난다. 매년 벚꽃이 피기 직전인 3월에 시작해 한국시리즈 우승 팀이 정해지는 10월까지. 월요일을 제외하면 매일매일이 ‘야구하는 날’이다.

혹자는 야구의 꽃은 가을이라고 말할 것 같다. 포스트시즌을 거쳐 한국시리즈 우승 팀이 결정되는 계절이니까. 하지만 야구의 제철은 봄이라고 생각한다. 봄에는 승자 패자가 따로 없다. 26년째 이어지는 우승 가뭄에도 불구하고, 한화 이글스 팬들이 ‘올해는 다를 거야’ 생각할 수 있는 계절은 봄이 거의 유일하다.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우승을 맛보지 못한 롯데 자이언츠 팬들도 봄만큼은 비장한 심정으로 야구장을 찾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롯데는 이상하게 늘 봄에 성적이 좋았다. 오죽하면 ‘봄(에만 잘하는 롯)데’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다.

내게 봄은 ‘야구가 시작하는 계절’이다. 벚꽃은 열흘이면 지지만, 야구는 세 계절 동안 144경기를 치른다. 겨울 동안 전력을 보강한 10개 팀이 저마다 새로운 각오로 마운드에 오른다. 이제 저녁은 야구 보는 시간이다. 저녁 식사 때마다 여러 유튜브 채널을 전전하며 ‘밥 먹을 때 뭐 보지’ 하던 고민도 끝. 나는 매년 벚꽃 필 무렵이면 야구를 보기 위해 연차를 낸다. 물론 퇴근 후에 야구장에 갈 수도 있지만, 경기 시작을 알리는 환호성을 듣기에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은 빠듯하다. 그래서 하루를 온전히 비운다. 낮에는 캐치볼, 저녁에는 야구장. 매년 봄이 왔음을 자축하는 세리머니를 준비한다.

 


“번갈아 미안함을 느끼고 땀 흘리는 시간.
그렇게 한참 공을 주고받다 보면 꽤 근사한 대화를 나눈 듯한 기분이다.”

3 / 10

G트윈스와 키움 히어로즈 경기가 열렸던 고척 스카이돔.

G트윈스와 키움 히어로즈 경기가 열렸던 고척 스카이돔.

캐치볼은 근사한 대화 같은 것

캐치볼을 위해 찾는 곳은 늘 정해져 있다. 서울대학교. 나는 서울대학교에 등록금을 낸 적은 없지만, 근처 사는 서울 시민으로서 서울대학교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서울대학교 후문을 따라 캠퍼스에 들어가면 꽤 넓은 공원 같은 장소가 나온다. ‘버들골 풍산마당’. 평지가 아닌 언덕을 깎아 만든 곳이라 공원이라기보다 들판에 가깝다. 이곳을 찾는 이유 중에는 강아지 산책도 있다. 곳곳에 돗자리를 깔기 좋은 나무들이 서 있고, 드넓은 잔디밭은 강아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뛰어놀기에 최고의 장소다. 평일 낮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내가 잘못 던진 공을 맞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곳이 나의 텔레토비 동산이다. 봄이 되면 개나리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이면 머리 위로 관악산의 녹음이 펼쳐지는 곳. 강아지에게 간식을 먹이고 나면 다음은 글러브를 낄 차례다. 캐치볼은 대화 같은 것. 말을 하지 않아도 날아오는 공 하나하나에서 서로의 생각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더 세게 던지려고 했구나, 방금 공은 내가 잡기 편하라고 던진 공이구나, 엉뚱한 곳으로 날려버려서 미안해하겠구나. 캐치볼을 할 때 지키는 룰은 하나다. 상대가 잘못 던진 공은 내가 주우러 간다. 반대로 내가 실수한 공은 상대방이 주우러 간다. 공을 쫓아 달려가는 뒷모습을 향해 “쏘리!”를 외치며, 번갈아 미안함을 느끼고 땀 흘리는 시간. 그렇게 한참 공을 주고받다 보면 꽤 근사한 대화를 나눈 듯한 기분이다. 어느덧 그림자가 길어지면 다시 짐을 정리하고 야구장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우리나라에는 여덟 개 도시에 아홉 개 프로야구장이 있다. 야구는 여행을 하기 위한 좋은 빌미가 되어준다. 연고가 없다면 평생 갈 일이 없을 대전도 야구 팬들에게는 한 번쯤 방문하고 싶은 도시다. 부산 여행 일정을 짤 때도 사직야구장은 늘 중요한 옵션 중 하나다. 꼭 내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가 아니더라도, 구단마다 다른 응원가를 듣고, 구장 근처의 맛집을 돌아다니는 것도 야구를 보는 즐거움이니까. 야구장마다 테마도 다르다. SSG 랜더스가 사용하는 인천 SSG랜더스필드에는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바비큐존’이 있다. 올해 새롭게 문을 연 한화 이글스의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에는 백종원의 더본코리아 브랜드가 입점한 ‘더본 테이스티존’이 있다. 게다가 아시아 최초의 인피니티풀까지 갖췄으니 사실상 테마파크나 다름없다. 실제로 최근에는 대만 웨슬리 여자고등학교 학생을 포함한 104명이 ‘방한 여행 상품’으로 야구장을 방문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 이기든 지든 봄의 야구는 즐겁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염원이 올해는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까.”

3 / 10

매년 캐치볼을 하고 있지만, 구속은 여전히 그대로다.  

  • 매년 캐치볼을 하고 있지만, 구속은 여전히 그대로다.
  • 언제나 최고의 피크닉 장소가 되어주는 버들골 풍산마당.
  • 강아지는 최고의 캐치볼 파트너다.
  • 캐치볼 할 때는 블루투스 스피커와 간식 준비가 필수.

기어코 봄은 온다

이번 기사를 위해 그간 벼르던 고척스카이돔에 가기로 했다. 고척스카이돔은 국내 유일의 돔 구장이다. 이맘때 잠실 야구장은 선선한 날씨와 해 질 무렵 노을과 함께 경기를 관람할 수 있지만, 거대한 둥지 안에서 경기를 보는 맛은 어떨지 궁금했다. 4월 8일은 LG 트윈스와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원래 연고지대로라면 나는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는 게 맞고, 지금도 삼성을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 고등학생 때까지 열심히 삼성 경기를 챙겨 봤지만 대학생이 되고 고향을 떠난 후로 조금씩 야구에 대한 흥미가 식었다. 다시 야구를 보기 시작한 건 지금 만나는 연인 덕분이다. 경기도에서 나고 자란 여자친구는 LG 트윈스 팬이다. 나는 이제 삼성 라이언즈 선수보다 LG 트윈스 선수들의 타율을 더 잘 안다.

고척돔에 도착했을 때는 LG 트윈스의 1회초 공격이 한창이었다. 미리 예매해둔 4층 좌석으로 올라가는 도중, 경기장 안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스크린을 보니 벌써 2 대 0으로 LG가 앞서고 있었다. ‘리그 출루율 1위’ 홍창기를 선두로 신민재, 오스틴이 연달아 안타를 치며 만루가 됐다. 곧이어 4번 타자 문보경의 2루타로 LG가 리드를 잡았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는 안타까울 만큼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리그 1위와 8위의 경기였지만 그래도 프로 대 프로 아닌가.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것. 두 번째 이닝이 끝났을 때 점수 차는 9점으로 벌어졌다. 5회 키움이 1점을 만회하긴 했지만, 7회초 김현수의 시즌 1호 홈런과 박동원의 백투백 홈런이 터졌다. 이날 최종 스코어는 13 대 1. 이날 고척돔에는 경기 내내 홈팀 팬보다 원정팀 팬들이 더 많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 유튜브를 열자 ‘문형배 헌법재판관조차 고개 저은 마성의 야구 경기’라는 제목의 영상이 떠올랐다. 최근 대통령 탄핵 선고 결정문을 읽으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문형배 재판관이었다. 알고 보니 그 역시 야구 팬이었다. 경남 하동 출신인 문형배 재판관은 꽤 오래전부터 롯데 자이언츠 팬이었던 모양이다. 이번 탄핵 심판 이후 그가 트위터에 올린 글들이 뒤늦게 화제를 모았다. 그는 2020년 5월 8일에 ‘롯데 자이언츠 4연승 놀랍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날 롯데 자이언츠는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1 대 6으로 뒤지던 스코어를 뒤집고 연장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모든 야구 팬이 매일 행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2012년 9월 22일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대선으로 심각한 상황에서 이런 말 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롯데 자이언츠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안타까운 마음에 내일 사직구장에 가서 응원할 생각이에요. 잘할 때 응원하는 거 누군들 못하겠어요. 못할 때 응원하는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팬이죠.’ 문형배 재판관이 부산지법 판사로 임명된 것은 1992년이다. 같은 해 롯데 자이언츠는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 후로 33년이 지나는 동안 젊은 신임 판사 문형배는 헌법재판관이 되어 탄핵을 선고했고, 총 8명의 대통령이 나왔으며, 롯데 자이언츠는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야구 팬도, 비야구 팬도 왜 만년 꼴찌 팀을 응원하냐고 한다. 요즘 야구 커뮤니티에는 탄핵 선고문을 패러디한 ‘롯데 해체 선고문’이 떠돌고 있다. 하지만 모르는 소리. LG 트윈스는 야구 팬들의 오랜 조롱거리였다. 이들의 암흑기 시절, 어느 LG 팬이 남긴 ‘이 팀은 솔직히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안 됩니다’라는 일갈은 지금까지 야구 팬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된다. 하지만 이들의 우승은 지구 멸망보다 빨리 찾아왔다. LG 트윈스는 2년 전 29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는 4월 13일 기준, LG 트윈스는 승률 0.867로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이기든 지든 봄의 야구는 즐겁다. 지구 멸망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염원이 올해는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무리 겨울이 길고 야속해도 기어코 봄은 온다는 걸.

3 / 10

이병규는 LG 트윈스의 두 번째 영구결번 선수다.  

  • 이병규는 LG 트윈스의 두 번째 영구결번 선수다.
  • 이날 경기장에는 원정팀 팬들이 눈에 띄게 더 많았다.
  • 유광 점퍼를 입고 야구장을 찾은 LG 트윈스 팬 가족.
  • LG 트윈스 팬들은 하나쯤 갖고 있을 응원 배트.
  • 야구장에 갈 때마다 티켓을 모으는 재미도 쏠쏠하다.

3 힘쓰는 봄

달리고, 매달리고, 뛰어넘는 나의 봄.
Editor


김지수

다시 크로스핏을 하러 갔다. 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건 작년 5월. 잠시 중단한 이유는 다양하다. 반복되는 야근으로 결석이 잦았고 때마침 회원권이 만료됐다. 당시 이직을 앞두고 있어 갱신하지 않았다. 출근하고 몇 주는 적응 기간이 필요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다 핑계였다. 하려면 얼마든지 했을 거란 사실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한창 크로스핏에 빠졌을 때는 저녁에 운동하러 갔다가 밤새 탈고하기도 했다. 쳇바퀴 같은 마감이 일상인데 결석이 많아졌다는 건 그냥 해이해졌다는 증거다. 게을러진 내 모습을 들키기라도 한 걸까. 선배가 5월호 피처 기획으로 ‘에디터가 봄을 맞이하는 자세’를 진행하자고 했다. 괜히 찔렸다. 저마다 봄을 맞는 방식이야 다양할 텐데 나는 크로스핏이 떠올랐다.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재시동을 거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 조그만 새싹도 봄에는 머리를 든다는데 그보다 1만 배는 큰 인간이 안주할쏘냐. 짧은 겨울잠을 마친 동물처럼 크로스핏 박스로 기어나갔다. 여기서 한 가지, ‘박스(box)’는 크로스핏을 하는 공간을 가리킨다. ‘짐’이나 ‘피트니스센터’라고 하는 보통의 체육관과 용어가 다르다. 로잉 머신과 바벨, 플레이트 등 기구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이 창고를 연상시켜 붙은 이름이다. 실제로 거칠고 투박하다. 하지만 장소가 주는 묘한 힘이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헬스장보다 매력적이다. 운동하는 순간만큼은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 참가자라도 된 기분이다.

그리고 그 매력은 으샤으샤 서로 기운을 북돋을 때 배가된다. 불과 한두 달 쉬었을 뿐인데, 박스로 향하는 길은 신년을 맞이하는 것처럼 새로웠다.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고민하다 따릉이를 선택했다. 나름의 워밍업이었다. 그새 몸이 좀 무거워졌지만 마음만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얼굴에 기분 좋은 바람이 스쳤다. 봄이었다. 이마와 콧등에 땀이 맺힐 때쯤 박스에 도착했다. 며칠 전, 운동 재개와 취재를 위해 겸사겸사 내가 다니던 ‘크로스핏 제스트’ 이두영 헤드 코치께 연락을 했다. 조금 머쓱했다. 1년도 채 안 된 회원이, 그것도 몇 달 만에 찾아와서 촬영 협조를 구하는 게 겸연쩍었다. 하지만 이두영 코치는 흔쾌히 취재에 응해주었다. 감사한 마음에 그와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는 꾸준히 나와야죠!”라고 너스레를 떨며 다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본격 와드에 들어가기 위해 운동에 필요한 보호 장비를 챙겼다.

 


“봄을 맞아 운동을 재개했지만,
매년 돌아오는 봄처럼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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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강도 와드 전 충분한 워밍업은 필수.

고강도 와드 전 충분한 워밍업은 필수.

나의 봄은 당신의 봄보다 뜨겁다

크로스핏은 이른바 ‘와드(WOD)’라고 칭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한다. 와드는 ‘Workout of The Day’의 약자, 그날의 운동이란 뜻이다. 보통 제한 시간 내 반복 횟수를 최대한 많이 하거나 주어진 운동을 가능한 빠르게 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이날 와드는 16분 동안 라운드 도달을 최대한 많이 하는 암랩(AMRAP, As Many Reps As Possible)이었다. 내가 느낀 크로스핏의 좋은 점은 워밍업을 충분히 한다는 점이다. 수업이 1시간이라면 30~40분은 몸을 풀고, 당일 와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는다. 보기와 달리 다칠 일이 적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얼마든지 강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 크로스핏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고강도 운동 아니에요?” “체력이 되게 좋은가 봐요. 나는 절대 못 해”라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듣는다. 고강도 운동은 맞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게 크로스핏 진입에 영향을 주느냐고 물으면? 아니다. 내가 다니는 박스는 매일 와드를 세 가지 단계로 나눈다. 각자의 레벨에 맞게 운동하기 위함이다. 그 단계 안에서 또 세부 조정을 한다. 못하는 동작이 있으면 다른 동작으로 바꾸고, 일정 횟수를 여러 번 반복하기 힘들다면 횟수를 줄이기도 한다. 이런 맞춤형 운동이 어딨나. 나도 코치의 지도하에 중간 단계와 가장 낮은 단계 사이로 수준을 조정했다. 크로스핏은 무게를 초과해 들거나 무리해서 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안전하다.

와드가 적힌 화이트보드를 올려다봤다. 눈으로 순서를 쭉 훑었다. 오케이. 내가 자신 있는 더블 언더(줄넘기 이단 뛰기)가 라운드에 포함되어 있었다. 역도 용상과 비슷한 동작을 덤벨로 수행하는 덤벨 행 클린 앤 저크, 버피도 나쁘지 않다. 철봉에 매달려 딥스로 상체를 올리는 바 머슬 업 동작은 감히 못하지만, 시선을 돌리니 아래 레벨에 밴드 풀업이 있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1라운드가 지나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분명 박스로 가는 길에 봄을 느꼈는데, 지금이 여름이었나? 원래도 ‘땀수저’이긴 하나 정신이 아득해졌다. 링 위에 올라선 종합격투기 선수처럼 1분, 1분이 더디게 흘렀다.

너무 힘들었다. 잠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의 그 누구도 멈추지 않고 꿋꿋이 제 갈 길을 갔다. ‘As Many Reps As Possible’을 성실히 지키고 있는 사람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라운드를 지속해갔다. “삐~.” 드디어 라운드 종료음이 울렸다. 16분 안에 최소 4라운드는 해야 한다고 했는데. 3라운드를 마치고 4라운드로 향하던 차에 제한 시간이 끝났다. 빨리 지나면 좋겠다고 생각한 시간이 끝날 때가 돼서야 아쉬워졌다. 크로스핏은 와드 종료 후 화이트보드에 각자의 기록을 적는다. 4~5라운드 사이에 초라한 3라운드가 적혔다. 역시 뭐든 바지런히 해야 한다. 결과를 보니 정진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남들보다 몇 도는 높은 나의 뜨거운 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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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없이 풀업하는 날이 올까. 

  • 밴드 없이 풀업하는 날이 올까.
  • 성실한 크로스핏터들 사이 적힌 초라한 기록.
  • 이 순간만큼은 <피지컬: 100> 속 출연자가 된 기분이다.
  • 운동은 장비발.

포기하지 않는 정신

크로스핏을 시작한 날이 떠오른다. 박스에 직접 가기 전까지도 나는 이 운동에 대해 꽤 많이 들었다. 국내에 크로스핏이 알려지기 시작한 20대 초반, 같은 교회에 다니던 건장한 오빠가 크로스핏을 한다고 했다. 새로운 운동이 흥미롭긴 했지만 운동을 주기적으로 하던 때는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호기심에 멈췄다. 이후 스치듯 만난 이상형에 가까운 남자가 매일같이 즐기던 운동이었고, 친구의 남자친구가 한다던 취미였다. 돌이켜보면 크로스핏이 나에게 계속 속삭인 것 같다. 날 좀 보라고. 한번 해보라고. 직접 해보니 잘 맞았다.

실제로 필라테스나 요가처럼 정적인 운동보다 웨이트트레이닝을 선호했던, 그리고 ‘E’ 성향이 강한 나에게는 최적의 운동이었다. 직접 해보기 전까지 나에게 크로스핏은 그야말로 남성의 전유물, 힘의 상징 같았다. 하지만 처음 찾은 박스는 생각보다 여성들로 가득했다. 성비로 따지면 여성 6 대 남성 4랄까. 운동을 하면서 미의 기준도 조금씩 바뀌었다. 여성 회원 중에 ‘마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웨이트트레이닝이 몸을 디자인하는 개념이라면, 크로스핏은 신체 기능을 수평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주목적이 있다. 이러나저러나 ‘날씬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나도 통상적인 미를 바라고 따랐다. 크로스핏을 하면서 단단한 허벅지에 어깨 위 승모근이 솟아 있어도 무게를 잘 들고, 철봉 위를 날아다니는 언니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이제는 체중계 숫자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크로스핏을 하면서 한 가지 배운 점도 있다. 바로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운동은 과한 무게나 기록을 강요하지 않는다. 잠시 숨을 고르더라도 끝까지 해내는 걸 권장한다. 단순해 보이는 끈기는 싫증을 잘 내고 뒷심이 부족한 성향에도 도움이 됐다. 버피 한두 개, 풀업 한두 개씩 갯수를 늘리고, 10파운드에서 15파운드로 덤벨 무게를 올리며 나만의 속도로 달려가는 중이다. 이것 말고도 또 한 가지 배운 사실이 있다. 진정한 ‘크로스핏터’는 절대 와드만 하지 않는다. 이건 예의 같은 거다. 러닝이든 로잉 머신이든 상체나 하체 근력운동이든. 일종의 루틴처럼 와드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유산소나 무산소운동을 추가한다. 와드만 해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데, 참으로 강해질 수밖에 없는 운동이다. 마음먹은 김에 나도 와드를 마치고 러닝을 했다. 날씨도 좋으니 양재천으로 나갔다. 벚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동네 양재천은 어느새 벚꽃 명소가 됐다. 러닝도 하고, 꽃구경도 하고 일석이조다. 남녀노소 나들이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몸을 풀었다.

요 몇 년 유행하듯 러닝 크루가 생기고, 마라톤 대회를 나가는 사람이 늘었다. 그에 비해 나는 러닝에 무지하다. 그래도 내게는 ‘나이키 런 클럽’이 있다. 애플 워치나 스마트폰 앱으로 4주, 6주 트레이닝 플랜에 도전할 수 있고, 그때그때 리커버리 러닝이나 장거리 러닝처럼 러닝의 성격과 시간, 거리 등 원하는 조건도 선택할 수 있다. 이날은 와드를 열심히 했으니 18분짜리 ‘퍼스트 파트렉 런’을 골랐다.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자, 준비되셨죠?” 에너지 넘치는 코치의 목소리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뛰다 보니 물 위를 노닐다 머리를 처박고 먹이 사냥을 하는 오리 궁둥이, 팝콘처럼 곳곳에 예쁘게도 터진 벚꽃을 볼 수 있었다. 시간도 금세 흘렀다. 러닝까지 마치고 나니, 매회 추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됐다. 언제나 시작이 어렵다. 봄을 맞아 운동을 재개했지만, 매년 돌아오는 봄처럼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올해는 더 자주, 꾸준히 박스에 나가야겠다는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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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화이트보드에 그날의 와드가 적힌다.

  • 매일 화이트보드에 그날의 와드가 적힌다.
  • 짐웨어 브랜드 ‘카키그라도’의 유쾌한 크로스핏 티셔츠.
  • 와드 종료음이 울렸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 줄넘기 이단 뛰기 중. 힘들어도 끝까지.
  • 봄 풍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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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Photographer 신동훈

202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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