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많이 마시면 술에 취하지 않는다?
숙취 해소에 대한 오해가 많다. 대표적으로 수분 섭취가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연구 결과는 다르다. 2024년 숙취와 수분 섭취량의 관계에 대해 리뷰한 연구에 따르면 숙취는 비교적 오래 지속되는 데 반해 탈수 증상은 대체로 가볍고 단기간에 그친다. 즉 물을 마시면 탈수 증상 완화에는 도움이 되지만 숙취 자체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음주의 후유증으로 탈수와 숙취가 나타날 수 있지만 이 둘은 별개의 현상이고 탈수 때문에 숙취가 생기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음주 시 물을 마시면 덜 취한다고 느끼는 것은 수분 섭취로 음주량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알코올의존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 술을 마시려는 욕구가 줄어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2017년 독일의 한 연구팀이 23명의 알코올의존증 남성 환자를 대상으로 한쪽에는 미네랄워터 1,000ml를 마시게 하고, 다른 한쪽에는 마시지 않게 해 호르몬 수치를 비교했다. 연구 결과, 미네랄워터를 마신 참가자들은 음주 욕구와 관련된 호르몬 수치뿐만 아니라 음주에 대한 갈망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물을 많이 마시고 술을 적게 마시면 다음 날 숙취가 덜할 수밖에 없다.
“물을 마시면 탈수 증상 완화에는 도움이 되지만 숙취 자체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식물 추출물, 숙취 해소에 도움 돼
숙취 해소제에 대한 여러 연구의 결론은 비슷하다. 일부 물질에 약간의 효과가 있지만 신빙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쪽이다. 2021년 12월 국제 학술지 <어딕션>에 게재된 영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21개의 숙취 해소제에 대한 위약(플라시보) 대조 무작위 시험 결과 일부에서 숙취 증상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정향 추출물, 소염 진통제 성분인 톨페남산, 헛개나무 추출물, L-시스테인, 홍삼, 한국 배 주스를 섭취하면 위약보다 전반적인 숙취 증상 점수가 낮아졌다. 다만 대부분 방법상 한계나 부정확한 측정으로 연구의 질이 매우 낮았다. 게다가 과학자들은 실험의 재현성을 중요시하는데 숙취해소제에 대한 어떤 연구 결과도 재현되지 않았다. 음주 뒤 숙취의 치료 또는 예방을 위해 사용을 권장하기에는 그 어떤 숙취해소제도 연구가 충분하지 않다는 게 연구자들의 결론이었다.
좀 더 긍정적 연구 결과도 있다. 2020년 독일의 한 연구에서는 과음하지 않는 한 아세롤라 추출물, 은행잎 추출물, 생강 추출물 등으로 만든 식물 추출 혼합물이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되지만 비타민, 미네랄, 포도당, 수분만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비교적 많은 수인 214명을 대상으로 위약과 식물 추출물·비타민·미네랄 혼합물, 비타민·미네랄 혼합물이 숙취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봤다. 음주량은 각 참가자의 재량에 맡겼지만 과음하지 않도록 했다. 그 결과 숙취 완화에 효과가 있었던 것은 식물 추출물뿐이었다. 아세롤라, 부채선인장, 은행잎, 버드나무, 생강 추출물과 비타민·미네랄·포도당을 혼합해 물에 녹인 것을 술 마시기 45분 전과 직후에 섭취하도록 했더니 숙취로 인한 두통, 오심(구역) 증상 완화에 상당한 효과(두통 34% 감소, 오심 42% 감소)가 있었다. 또한 음주량과 숙취 증상의 정도에 개인차가 상당히 크다는 사실도 나타났다. 사람에 따라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숙취 증상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몸속 염증, 숙취 원인이 되기도
염증을 줄이는 건 숙취 완화에 도움이 된다. 최근에는 머리가 아프거나 몸살이 나는 등의 숙취 증상을 염증 반응과 관련짓는 연구자가 많다. 알코올로 인한 산화 스트레스와 염증이 숙취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1983년 핀란드의 한 연구에서 소염진통제 톨페남산을 복용한 사람이 숙취 증상(두통, 구강 건조, 갈증, 구토, 메스꺼움, 피로)을 덜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부프로펜 같은 소염진통제가 숙취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음주 뒤 소염진통제는 위장관 출혈과 같은 부작용 위험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어쩌다 한 번은 몰라도 음주 뒤에 소염진통제를 복용하는 게 습관이 돼서는 안된다. 헛개나무 추출물도 원리는 비슷하다. 헛개나무 추출물이 염증 완화로 숙취 경감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국내 연구 결과가 있다. 술 마신 다음 날 블루베리처럼 당분 함량은 낮고 항산화 물질이 풍부한 과일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
“숙취 해소제는 섭취했을 때 실제로 술에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두통, 오심, 어지러움 같은 숙취 증상 완화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음주 직전과 직후에 추가 섭취하면 효과 커
숙취 해소제를 먹는다면 언제가 좋을까? 보통 음주 전후로 연구를 한다. 예를 들어 2017년 헛개나무 추출물 연구는 소주를 마시기 전에 헛개나무 추출물을 섭취하도록 했다. 2013년 한국 배 주스 연구는 소주를 마시기 30분 전에 배 주스를 섭취하게 했다. 숙취 해소제를 음주 직전에 섭취하고, 음주 중이나 음주 직후에 추가로 섭취하면 낫다는 말은 이런 연구 방법에서 나온 것이다. 숙취 해소제에 대해 기억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숙취 해소제로 판매되는 대다수의 제품은 액상 차, 혼합 음료와 같은 일반 식품이며 건강기능식품이 아니다. 심지어 건강기능식품으로 표시된 경우에도 숙취 해소 기능성을 인정받은 게 아니라 단순히 비타민 C 같은 건강기능식품 원료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시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숙취 해소 실증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 과학적으로 효능이 입증된 숙취 해소제만 ‘숙취 해소’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혈중알코올농도, 혈중 아세트알데히드 농도 측정과 함께 숙취 정도를 파악하는 설문지 조사 등을 포함한 객관적 지표를 통해 효과를 입증한 제품만 제품 광고에 ‘숙취 해소’라는 말을 쓸 수 있다. 현재까지 숙취 해소 물질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숙취 증상 완화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숙취 해소 음료나 관련 식품을 먹고 나서 술을 마시면 평소보다 술에 취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숙취 해소제를 입에 넣자마자 그 성분이 몸속에 흡수되기도 전에 술이 깨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이는 플라시보 효과일 가능성이 높다. 그 어떤 숙취 해소제도 실제로 술에 취하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니며, 과도한 음주로 인한 해를 모두 막아줄 수도 없다. 숙취 증상을 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금주 또는 절주다.
정재훈 약사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출신의 약사이며 푸드라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 방송 팟캐스트 <매불쇼>와 여러 TV·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약, 음식, 건강에 대한 과학적 지식 전파에 앞장서왔다. 신문·잡지 칼럼을 통해 약과 음식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하고 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소식의 과학> <음식에 그런 정답은 없다>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