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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시가 필요할까요?

핸드메이드 코즈메틱 브랜드 ‘러쉬(Lush)’의 시집 <러시> 발간 기념 행사에서 시인 최영미를 만났다. 그녀는 우리에게 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 같은 건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UpdatedOn December 29, 2016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몰고 온 감정의 폭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폭격’이라는 단어를 최영미가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1999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1980년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글자로만 읽었다. 나는 그 시대를 몸으로 살아낸 선배들이 ‘전사’나 ‘투사’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통해 읽은 건, 평범하고 여린 청춘의 고백이었다.

나는 그 시들을 읽으며 종종 울었다. 그 어느 시절이 너무 구체적으로 느껴져서. 최영미는 이 시집이 심하게 오독되었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나는 오독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기록했지 않은가. 시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다. 그리고 시가… 너무 아름다웠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50만 권이 팔렸다. 그 후로 몇 권의 시집, 장편 소설을 발표했지만 최영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저 시집을 떠올린다. 작가에겐 괴로운 일일 수 있으나, 나는, 어쩌면, 소중한 한 명의 작가를 떠올리는 데 한 권의 시집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2016년 가을, 다시 어쩔 수 없이 그 한 권의 시집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자괴감이 든다.

근황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바빠요. 작년부터 강의를 많이 해요. 2014년에 장편 소설 <청동정원>을 출간했는데, 그전까지는 강의 요청이 와도 안 하고, 사람도 안 만났어요.

소설을 쓰기 위해서요?
네. <청동정원>은 제 인생의 숙제였어요.

시가 아니라 소설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었고, 놀라웠어요.
이제 안 쓸 거예요. 꼭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2005년에 <흉터와 무늬>를 출간했고, 2014년에 <청동정원>을 출간했어요. 이 작품은 10년 동안 썼어요.

긴 시간이네요.

길죠. 첫 문장을 20대 후반에 썼으니까 더 길었죠. 1988년 여름에 이 이야기를 처음 떠올렸어요. 그런데 그때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어요. 시간이 필요했나 봐요. 나는 뭐든지 오래 가지고 있어요.

아…. 청춘을 기록하신 거네요.

네. 20대를 정리한 거죠. 물론 소설이지만요. 이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바빠질 수 있는 거겠죠?

네. 요즘처럼 바쁜 적이 없어요. 엄마가 병원에 계셔서, 저랑 동생이랑 간병을 해요. 간병이 손이 많이 가는 일이더라고요. 하지만 보람도 느껴요. 그동안 글 쓴다고 엄마한테 소홀했어요. 그래서 병이 난 거 같아요. 제가 맏딸이에요. 딸 셋인 집에서.

최영미의 시를 볼 기회가 별로 없어서 아쉽습니다.

쓰긴 써요. 그런데 써도 누가 읽나요? 써질 땐 쓰고 안 써지면 못 쓰고. 청탁이 들어와도 안 써질 땐… 미안하다고 말해요.

시집은 출간 계획이 없으세요?

없어요. 시를 쓰고 싶지 않아요.

왜요?

여러 이유가 있겠죠. 일단 제가 한국 사회에서 작가로서 경쟁력이 떨어진 거 같아요.

겸손한 말씀이세요.

아니에요. 제 작품을 사람들이 잘 안 읽어요. 문학은 소통을 전제로 하는데… 지난 20년간 10권 넘게 책을 냈는데 첫 시집 이후로는 성공한 게 없어요. 슬픈 일이죠. 꾸준히 활동했는데도 첫 시집만 기억된다는 게.

평생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을 그 시집 한 권으로 다 받아버린 게 아닐까….

그런 것도 있죠. 첫 시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게 힘들어요. 시에 대한 오역도 많았고요.

아… 네.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여기서 상기시키지 않을게요. 인터뷰를 읽는 독자들이 따로 찾아보면… 좋겠어요. 그 시집이 지닌 논쟁의 지점이 여전히 유효하고, 다르게 접근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시국에는 더욱!

그 시집이 도발적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평가가 싫어요. 도발하려고 쓴 게 아니에요. 직설적이라고도 하는데, 직설적이지 않아요. 은유가 숨어 있어요. 독자와 제가 안 맞나 봐요.

50만 권이 팔렸죠. 시집이, 50만 권이요.

네. 첫 시집이 성공해서 오히려 불행해진 작가랄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러쉬의 ‘러시’ 프로젝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어요? 코즈메틱 브랜드 러쉬의 ‘쉬’를 ‘시(詩)’로 읽은 발상이 재밌어요.

6월에 러쉬 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덕찌’라는 게 있어요. 러쉬가 만든 배지라고 할 수 있는데, 굉장히 많아요. 이걸로 40편 정도 시를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제가 그렇게 많이 쓰기는 힘들다고 했어요. 기업을 위해서 시를 써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가 러쉬 제품을 사용한 적은 있어서, 제품을 몇 개 아니까, 시도 한두 편은 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몇 편 쓰고, 고객도 같이 시를 쓰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시들을 제가 심사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그래서 제안을 했어요.

시 쓰는 게 힘들다고 하셨지만, 이 행사의 주제는 ‘우리에게 왜 시가 필요할까요?’예요. 왜 시가 필요할까요? 세상이 이렇고, 읽는 사람도 적은데.
나도 스스로 질문하고 있어요. 시를 읽거나 쓰면서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잖아요. 시는 가장 오래된 형식이죠. 생활에 치여 사느라 의식하진 못하지만, 시는 공기처럼 우리 삶의 한 부분이에요. 시는 곧 노래니까.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 시니까. 표현 안 하고는 인간이 살 수 없지. 목소리를 내는 건데….

심사하면서 즐거우셨을 것 같아요. 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 멋진 작품을 쓰기도 하잖아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어떤 시들은 놀랄 만큼 훌륭했어요. 삶이 녹아 있는 거예요. 러쉬 제품과 연관해서 시를 써야 했는데, 어떤 사람은 러쉬 제품에서 헤어진 남자친구의 냄새를 맡고, 시골에서 올라온 한 젊은이는 러쉬에서 도시 냄새를 맡았다는 거예요. 사치스러운 향이겠죠. 그 향을 맡기 위해 러쉬 제품을 사기도 한대요. 우리 삶이 고단하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사치를 누릴 필요도 있잖아요.

행복한 사치죠.

냄새라는 게 굉장히 원초적이에요. 소크라테스가 그랬대요. 인간을 가장 빨리 행복하게 만드는 게 향이라고.

기억에 남는 작품을 몇 개 이야기해주세요.
몇몇 작품은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좋은 시는 외우지 않아도 오래 기억나잖아요. 그중 하나가 ‘전등’이라는 시인데, 전등을 보고 썼더라고요. 나를 봐달라고, 이렇게 뜨겁게 타올라 밝혔는데 너는 왜 나의 빛으로 다른 곳을 보는가 하는 내용이었어요. 정말 완벽한 시였어요. 한 초등학생이 쓴 시도 참 마음에 남아요. ‘요정의 가루’라는 시예요.

네. 인터뷰 정리할 때 제가 전문을 적어둘게요.


길을 가고 있었지 / 냄새가 나는 황금 가루를 따라서 / 몰랐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 / 하지만 갔지 가루와 냄새를 따라서 / 기다렸지 요정이 오기를 / 기다리고 기다렸지 /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워졌지 / 마침내 왔지 / 그 냄새와 색깔을 맡기고 / 다시 그곳으로

‘어디 갔어’라는 시도 참 좋았어요.

우리 집 퀴퀴한 신발장 냄새 / 화장실에 걸린 나프탈렌 냄새 / 겨울 이불 처음 꺼냈을 때 냄새 /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나는 / 된장찌개 냄새 // 주름진 손에 바르라고 내가 사준 / 핸드크림 냄새 // 연기가 하늘거리며 올라가던 향 냄새 // 엄마 보고 싶다

시인만 시인이 아니네요. 심사하면서, 다시 시를 쓰고 싶어졌다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나도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갑자기 이런 질문을 드려서 죄송한대요, 시국을 어떻게 보고 계세요?

답답하고 분노가 들끓지요. 저는 정치에 대한 발언을 자제했어요. 1987년 6월 항쟁 때 매일 거리에 나갔어요. 20대를 그렇게 보냈기 때문에 이제 더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세대는 뒤로 물러나는 게 옳다고 생각한 건데, 이번 사건을 보고 깜짝 놀랐죠. 이 나라가 아직도 유신 시대에 사로잡혀 있구나.

이번 문제가 처음 불거진 게 문화 체육 관련 재단의 기금 모금 때문이었어요.

문화판이 썩었다는 건 진작 알았죠. 문화와 스포츠 부분은 애매해요. 사업 비용이 얼마나 들지도 모르고. 차라리 문화 관련 예산을 과감하게 축소하거나, 아예 문화체육부 자체를 없애면 좋겠어요.

없애요?

그게 오히려 이 나라 문화 체육 발전에 도움이 돼요. 문화체육부가 몇백억 예산 가지고 뭘 했어요? 저는 오히려 가난했던 1970년대에 우리 문화가 더 아름다웠다고 생각해요. 이 말 꼭 써주세요. 문화체육부가 없어지는 게 문화 체육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박근혜 정부의 주요 국정 기조 중 하나가 ‘문화융성’이었는데….

제가 아주 격노했죠.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문화를 융성하려면 일단 정치나 잘하시라고.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정의가 실현되면 문화는 저절로 발전하게 되어 있어요. 문화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 대통령이 된 거예요. 굉장히 불행한 일이죠. 대통령이 가장 갖춰야 할 덕목이 저는 교양이라고 생각해요. 교양이 없으니까 이상한 친구 말만 듣고 시키는 대로 하죠. 교양이 없어요, 교양이.

뜬금없는 말로 마무리 짓는 거 같긴 한데, 그래서, 그러니까, 시가 필요한가요? 그렇겠죠?
네, 그렇다고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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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우성
PHOTOGRAPHY 김선익

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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